어느 날, 친구가 내 모습을 살피더니 잠시 일상을 멈추고 경포해변을 걸어보란다.
“그곳에 가면 선물 같은 뭔가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찾아 봐.”
경포 이야기에 보태어 아예 주문을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온 뒤로 줄곧 타향살이하는 내게 강릉은 그리운 어머니의 땅이었다. 강릉여고를 다닐 때 RCY단장이셨던 담임선생님과 경포해변에서 환경보호운동을 펼쳤지.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횟집, 찻집들…. 

친구의 말을 기억하며 찾은 강릉 경포대! 훅 바다 내음이 밀려온다. 시원한 파도의 몸짓에 가슴이 탁 트인다. 파도의 언어를 들으려고 마주섰다. 살아온 날들이 바다에 덧입혀진다. 콧등이 찡하고 울컥해진다.
얼마를 바다와 조우하고 해변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정말로 나를 맞아주는 그 무엇이 있었다. 2.5m 빨간색 대형 우체통이 ‘추억의 느린 우체통’이라는 이름으로 발길을 멈추게 했다.

엽서를 써서 넣으면 1년 뒤에 배달되는 특별한 우체통! 서울 중구 우표박물관, 부산 동구 유치환의 우체통, 전북 무주 머루와인동굴 등에도 느린 우체통이 있지만, 경포해변의 느린 우체통은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분주하게 지내다 날숨 토할 곳을 찾아 나선 발길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엽서에다 뭔가를 쓰고 있다. 순간만이라도 설레는 청춘의 시간이고자 하는 걸까. 원고 마감에 저당 잡혀 시간의 여유를 누리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또 늦게 시작한 대학원 공부로 얼마나 종종걸음 쳤던가. 그런 내게 느린 우체통이 말을 건네고 있다. 진정 자신의 삶을 살고 있냐고.

모처럼 느린 우체통 앞에서 나를 돌아보았다. 자발적 생명력으로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 왔는지, 아니면 누군가의 평가를 의식하며 지내진 않았는지…….
선물 같은 만남 앞에서 내게 엽서를 쓰기 시작했다.

앞만 보고 사느라 고생 많았다.
이제 바다도 보고 하늘도 보고 살자.…….